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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대 시드머스 자작 헨리 애딩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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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헨리 애딩턴(1757년 ~ 1844년)은 초대 시드머스 자작으로, 1801년부터 1804년까지 영국의 총리를 역임했다. 그는 앤서니 애딩턴의 아들로, 1784년 하원 의원으로 선출되었고 1789년 하원 의장이 되었다. 1801년 윌리엄 피트(소)의 사임 이후 총리가 되었으며, 아미앵 조약을 체결하여 프랑스와의 일시적 평화를 이끌었으나, 재임 기간 동안 의회를 장악하지 못하여 1804년 사임했다. 이후 여러 직책을 거쳐 1812년부터 1822년까지 내무부 장관을 역임하며 피터루 학살과 치안 6법 제정에 관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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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대 시드머스 자작 헨리 애딩턴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윌리엄 비치의
윌리엄 비치가 그린 "헨리 애딩턴의 초상" (1803년경)
존칭 접두사더 라이트 아너러블
이름시드머스 자작
존칭 접미사PC
출생일1757년 5월 30일
출생지베드포드 로, 미들섹스, 잉글랜드
사망일1844년 2월 15일
사망지화이트 로지, 서리 주, 잉글랜드
안장지세인트 메리 더 버진 교회, 모틀레이크
국적잉글랜드
정당토리당 (애딩턴파)
배우자어슐라 해먼드 (1781년 결혼, 1811년 사망)
매리앤 타운센드 (1823년 결혼)
자녀8명 (해먼드와의 사이에서)
부모앤서니 애딩턴 (아버지)
친척존 하일리 애딩턴 (형제)
헨리 언윈 애딩턴 (조카)
교육쳄 스쿨
레딩 스쿨
윈체스터 칼리지
모교브레이즈노즈 칼리지, 옥스퍼드 대학교
잉크로 쓴 필기 서명
잉크로 쓴 서명
정치 경력
직위영국 총리
임기 시작1801년 3월 17일
임기 종료1804년 5월 10일
군주조지 3세
이전윌리엄 피트
이후윌리엄 피트
직위영국 하원 의장
임기 시작1801년 1월 1일
임기 종료1801년 2월 10일
군주조지 3세
총리윌리엄 피트
이전사무실 설립
이후존 미트포드
직위그레이트브리튼 하원 의장
임기 시작1789년 6월 8일
임기 종료1800년 1월 31일
군주조지 3세
총리윌리엄 피트
이전윌리엄 그렌빌
이후사무실 폐지
직위하원 의원 (디바이즈 선거구)
임기 시작1784년
임기 종료1805년
이전헨리 존스
이후토머스 그림스턴 에스토코트
추가 정보
수상 재임 기간1801년 3월 17일 ~ 1804년 5월 10일
재무장관 재임 기간1801년 3월 14일 ~ 1804년 5월 10일
내무장관 재임 기간1812년 6월 11일 ~ 1822년 1월 17일
추밀원 의장 재임 기간1812년 4월 8일 ~ 1812년 6월 11일
1806년 10월 8일 ~ 1807년 3월 26일
1805년 1월 14일 ~ 1805년 7월 10일
왕새 재임 기간1806년 2월 5일 ~ 1806년 10월 15일
하원 원내대표 재임 기간1801년 3월 17일 ~ 1804년 5월 10일

2. 가족 및 초기 생애

헨리 애딩턴은 피트 더 엘더의 주치의였던 앤서니 애딩턴과 레딩 스쿨 교장 해빌랜드 존 하일리의 딸 메리 애딩턴 사이에서 태어났다.[6] 런던의 의사였던 아버지 앤서니 애딩턴은 초대 채텀 백작 윌리엄 피트 (대 피트)의 주치의였을 뿐만 아니라, 1788년에는 국왕 조지 3세도 진료했다.[6][7] 이러한 아버지의 지위 덕분에 애딩턴은 소 피트와 어린 시절 친구였다.

1781년 9월 19일, 애딩턴은 아슐라 메리 해먼드(1760년 5월 14일 – 1811년 6월 23일, 레오나드 해먼드의 딸)와 결혼하여[6], 4남 4녀를 두었다.[12]


  • 메리 앤 아슐라 (1782년 – 1847년 12월 24일[12])
  • 헨리 (1786년 9월 30일 – 1823년 7월 30일)[6]
  • 찰스 앤서니 (1789년 8월 20일 매장) - 요절[6]
  • 프란시스 (1870년 2월 27일 사망) - 1820년 6월 20일, 조지 펠류(1866년 10월 13일 사망)와 결혼[13]
  • 윌리엄 레오나드 (1794년 11월 13일 – 1864년 3월 25일) - 제2대 시드머스 자작[6]
  • 샬럿 (1870년 사망) - 1838년 5월 2일, 호러스 고어 커리와 결혼[13]
  • 남자 (1798년 11월 21일 – 1798년 11월 24일[12])
  • 헨리에타 (1800년 6월 17일 – 1868년 8월 12일) - 1838년 1월 16일, 토마스 바커 월(1859년 3월 9일 사망)과 결혼[12]


1823년 7월 29일, 메리 앤 타운젠드(1783년경 – 1842년 4월 26일)와 재혼했지만[6], 두 사람 사이에는 아이가 없었다.[13]

2. 1. 가족 관계

헨리 애딩턴은 피트 더 엘더의 주치의인 앤서니 애딩턴과 레딩 스쿨 교장인 해빌랜드 존 하일리의 딸 메리 애딩턴의 아들이었다.[6] 아버지의 지위 덕분에 애딩턴은 윌리엄 피트 더 영거의 어린 시절 친구였다.

1791년, 그는 어슐러 메리 해먼드와 결혼했다.[6] 그녀는 결혼 생활에 연간 1,000파운드의 수입을 가져왔다. 부부는 8명의 자녀를 두었고, 그중 6명이 성인이 될 때까지 살아남았다.[6][12] 어슐러 애딩턴은 1811년 6월 23일에 사망했다. 이후 그는 윌리엄 스콧, 1대 스토웰 남작의 딸인 과부 메리 앤 타운젠드와 1823년 7월 29일에 재혼했지만[6], 두 사람 사이에는 아이가 없었다.[13]

3. 정치 경력

그는 1784년 하원에 데바이즈의 국회의원 중 한 명으로 선출되었고, 1789년에는 하원의장이 되었다.[6] 1801년 3월, 윌리엄 피트(소)는 조지 3세 국왕이 아일랜드 가톨릭교도에 대한 기존의 정치적 제약 일부를 해제하는 것을 거부했기 때문에 사임했지만( 가톨릭 해방), 건강 악화, 전쟁 실패, 경제 붕괴, 기근으로 인한 심각한 수준의 사회 불안, 그리고 내각 내의 화해할 수 없는 분열 또한 역할을 했다. 피트와 국왕은 애딩턴이 스스로 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국왕과 피트를 화해시키려는 그의 시도가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총리직을 맡을 것을 주장했다.[6][7]

1784년 영국 총선에서 디바이즈 선거구(Devizes (UK Parliament constituency))에 출마했다.[8] 디바이즈에서는 의류 상인의 영향력이 강했고, 애딩턴은 의류 상인 프린스 서튼(Prince Sutton)의 아들 제임스 서튼이 애딩턴의 여동생 일리나와 결혼한 것도 있어 무투표로 당선되었다.[8][9] 이후 1790년 영국 총선, 1796년 영국 총선, 1802년 영국 총선에서도 무투표로 재선되었다.[10] 의회에서는 토리당에 속했다.[6]

1789년 6월 영국 하원 의장 선거(June 1789 Speaker of the British House of Commons election)에서 소 피트 수상의 지지를 받아 215표 대 142표로 제4대 준남작 서 길버트 엘리엇을 꺾고 하원 의장에 당선되었다.[6] 6월 23일 추밀 고문관에 임명되었다.[6] 이후 1801년 2월 10일까지 의장을 역임했다.[6]

1791년 3월 24일 런던 고고학회 펠로우로 선출되었다.[6] 1792년, 링컨 법학원의 평의원으로 선출되었다.[11]

1801년 3월, 소 피트가 가톨릭 문제로 인해 사임하자 그를 대신하여 제1재무상 (수상) 겸 재무장관으로 취임했다. 애딩턴은 외무대신으로 임명한 로버트 젠킨슨 (후에 제2대 리버풀 백작)을 통해 프랑스와의 평화 협상을 진행하여, 1802년에 아미앵 조약을 체결하고 일시적으로 평화를 되찾았다.[7]

그는 소 피트 계열 의원으로 여겨졌지만, 정권을 내려놓은 소 피트는 하원 의사당 정부 측 벤치의 세 번째 열에 앉았기 때문에 (이 자리에 앉는다는 것은 정부를 지지하지만, 반대할 가능성을 유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마저도 불확실해졌다. 소 피트 자신은 "당파를 형성하여 폐하의 정부에 반항하는 것은 죄악"이라는 가치관을 가진 정당 정치 반대파였기 때문에, 명확한 야당 영수가 되려 하지 않았지만, 조지 캐닝이나 윌리엄 그렌빌 등 소 피트 측근들은 명확한 야당이 될 것을 소 피트에게 요구했다.

1803년 5월에는 아미앵 조약이 파기되어, 다시 프랑스와의 전쟁 상태에 돌입했다. 이로 인해 피트 재등용의 기운이 높아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당 영수가 되는 것을 주저하던 소 피트를 못마땅하게 여긴 그란빌은 독자적으로 야당 휘그당의 찰스 제임스 폭스와 접촉을 시작했다. 이를 위험하게 여긴 소 피트는 마침내 야당이 될 결심을 굳혔다. 애딩턴은 소 피트에게 전쟁 지도에 대한 협력을 요청했지만, 그것을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자 사임을 결심했다[7]。1804년 5월에 퇴진하여, 소 피트에게 수상의 지위를 넘겨주었다.

《죽음과 의사들 사이의 브리타니아》 (1804)에서 제임스 길레이는 피트를 브리타니아의 병실에서 애딩턴(이전 의사)을 쫓아내는 의사로 풍자했다.


국왕이 그를 지지했지만, 애딩턴이 의회를 충분히 장악하지 못했기 때문에 충분하지 않았다. 1804년 5월까지, 애딩턴의 전쟁 정책에 대한 당파적 비판은 세 개의 주요 파벌(그렌빌파, 폭스파, 피트파)이 애딩턴 내각을 교체하기로 결정하면서 의회 쿠데타의 구실을 제공했다. 애딩턴의 가장 큰 실패는 자신의 측근과 국왕의 친구들을 넘어 하원 의원들의 충성스러운 지지를 얻어 의회 다수를 관리하지 못한 것이었다. 그것은 그의 평범한 연설 능력과 결합되어 그를 피트의 의회 운영 능력과 비할 데 없는 웅변 기술에 취약하게 만들었다. 1804년 3월 피트의 애딩턴에 대한 의회 공격으로 그의 의회 다수가 줄어들어 하원에서 패배가 임박했다.

애딩턴은 하원에서 자신을 충성스럽게 지지하는 많은 하원 의원들을 확보했기 때문에 중요한 정치적 인물로 남았다. 그는 1804년 12월, 호크스베리 경의 중재로 피트와 화해했다.[2] 그 결과, 피트는 그가 1805년 1월 내각에 추밀원 의장으로 합류하도록 주선했다. 피트는 애딩턴이 하원에서 함께 앉는 불편함을 피하기 위해 귀족 작위를 받아들일 것을 주장했다. 애딩턴은 1805년 1월 12일에 데번주 시드머스의 시드머스 자작으로 창설되었다.[2] 1805년 1월 12일, 연합 왕국 귀족인 데번주 시드머스에서 시드머스 자작으로 서임되었고, 15일 귀족원 의원이 되었다[6]

애딩턴의 충성스러운 지지자들이 정부를 지지하는 대가로, 피트는 애딩턴의 동료인 로버트 호바트 (4대 버킹엄셔 백작)를 랭커스터 공작 영지 재상으로 포함시키고, 더 높은 직위가 공석이 되면 그를 내각의 더 선임된 직위로 승진시키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1805년 7월 멜빌이 해군 경(First Lord of the Admiralty)에서 사임하자, 피트는 버킹엄셔 대신 찰스 미들턴 경을 임명함으로써 약속을 어겼다. 배신으로 인해 애딩턴과 버킹엄셔는 사임했고, 모든 지지자들을 야당으로 데려갔다.[2]

제2차 소 피트 내각에서는 1805년 1월부터 7월까지 추밀원 의장을 맡았다[6]。 소 피트 사망 후 성립된 그렌빌의 "거국 인재 내각/Ministry of All the Talents영어" (연합 내각)에는 1806년 2월부터 10월까지 국새 상서, 1806년 10월부터 1807년 3월까지 추밀원 의장으로 참여했다[6]。 애딩턴은 1806년 피트를 계승한 모든 재능 내각에서 추밀원 부대신으로 임명되었다. 그해 말 그는 1807년까지 추밀원 의장 직으로 복귀했다. 그의 사임은 모든 재능 내각의 붕괴를 촉진했다. 애딩턴은 조지 3세 국왕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내각이 고려하고 있던 제한적인 가톨릭 해방 조치에 반대했다.

1812년 3월, 그는 다시 추밀원 의장으로 정계에 복귀했고, 같은 해 6월에는 내무부 장관이 되었다. 내무부 장관으로서 애딩턴은 혁명적 반대에 대처하여, 1817년 일시적인 인신 보호 영장 정지와 1819년 6개 법안 통과에 책임이 있었다. 그의 재임 기간 중에는 1819년 피터루 학살도 발생했다. 그는 1822년 사임했으며, 로버트 필 경이 그의 뒤를 이어 내무부 장관이 되었다. 1812년 4월 추밀원 의장으로 스펜서 퍼시벌 내각에 입각, 같은 해 리버풀 백작 내각이 성립되자 6월 내무부 장관으로 전임했다[6]。 이후 1822년까지라는 장기간 동안 이 직책에 재직했다[6]。 이 내각에서 그는 토리 반동 정치가의 대표격으로 알려졌으며, 여명기의 노동 운동에 대해 "피터루 학살"이나 집회 및 시위를 금지하는 "치안 6법" 제정 등 탄압 자세를 보였다. 1822년 1월 17일 내무부 장관에서 물러났지만, 무임소 장관으로 1824년 11월까지 내각에 머물렀다[6]。 후임에는 자유주의적인 로버트 필이 취임했다.

1814년 6월 16일, 옥스퍼드 대학교로부터 명예 학위를 수여받았다[6]

애딩턴은 1844년 2월 15일 런던에서 인플루엔자로 86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며, 현재 그레이터 런던에 있는 모틀레이크 하이 스트리트의 성 메리 버진 교회 묘지에 묻혔다.[4]

3. 1. 총리 재임 (1801년 ~ 1804년)



국왕 조지 3세가 그를 지지했지만, 애딩턴이 의회를 충분히 장악하지 못했기 때문에 충분하지 않았다. 1804년 5월까지, 애딩턴의 전쟁 정책에 대한 당파적 비판은 세 개의 주요 파벌(그렌빌파, 폭스파, 피트파)이 애딩턴 내각을 교체하기로 결정하면서 의회 쿠데타의 구실을 제공했다. 애딩턴의 가장 큰 실패는 자신의 측근과 국왕의 친구들을 넘어 하원 의원들의 충성스러운 지지를 얻어 의회 다수를 관리하지 못한 것이었다. 그것은 그의 평범한 연설 능력과 결합되어 그를 피트의 의회 운영 능력과 비할 데 없는 웅변 기술에 취약하게 만들었다. 1804년 3월 피트의 애딩턴에 대한 의회 공격으로 그의 의회 다수가 줄어들어 하원에서 패배가 임박했다.

1801년 3월, 소 피트가 가톨릭 문제로 인해 사임하자 그를 대신하여 제1재무상 (수상) 겸 재무장관으로 취임했다. 애딩턴은 외무대신으로 임명한 로버트 젠킨슨 (후에 제2대 리버풀 백작)을 통해 프랑스와의 평화 협상을 진행하여, 1802년에 아미앵 조약을 체결하고 일시적으로 평화를 되찾았다.[7]

그는 소 피트 계열 의원으로 여겨졌지만, 정권을 내려놓은 소 피트는 하원 의사당 정부 측 벤치의 세 번째 열에 앉았기 때문에 (이 자리에 앉는다는 것은 정부를 지지하지만, 반대할 가능성을 유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마저도 불확실해졌다. 소 피트 자신은 "당파를 형성하여 폐하의 정부에 반항하는 것은 죄악"이라는 가치관을 가진 정당 정치 반대파였기 때문에, 명확한 야당 영수가 되려 하지 않았지만, 조지 캐닝이나 윌리엄 그렌빌 등 소 피트 측근들은 명확한 야당이 될 것을 소 피트에게 요구했다.

1803년 5월에는 아미앵 조약이 파기되어, 다시 프랑스와의 전쟁 상태에 돌입했다. 이로 인해 피트 재등용의 기운이 높아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당 영수가 되는 것을 주저하던 소 피트를 못마땅하게 여긴 그란빌은 독자적으로 야당 휘그당의 찰스 제임스 폭스와 접촉을 시작했다. 이를 위험하게 여긴 소 피트는 마침내 야당이 될 결심을 굳혔다. 애딩턴은 소 피트에게 전쟁 지도에 대한 협력을 요청했지만, 그것을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자 사임을 결심했다[7]。1804년 5월에 퇴진하여, 소 피트에게 수상의 지위를 넘겨주었다.

3. 1. 1. 아미앵 조약과 대프랑스 전쟁 재개

(내용 없음)

3. 1. 2. 실각



국왕이 그를 지지했지만, 애딩턴이 의회를 충분히 장악하지 못했기 때문에 충분하지 않았다. 1804년 5월까지, 애딩턴의 전쟁 정책에 대한 당파적 비판은 세 개의 주요 파벌(그렌빌파, 폭스파, 피트파)이 애딩턴 내각을 교체하기로 결정하면서 의회 쿠데타의 구실을 제공했다. 애딩턴의 가장 큰 실패는 자신의 측근과 국왕의 친구들을 넘어 하원 의원들의 충성스러운 지지를 얻어 의회 다수를 관리하지 못한 것이었다. 그것은 그의 평범한 연설 능력과 결합되어 그를 피트의 의회 운영 능력과 비할 데 없는 웅변 기술에 취약하게 만들었다. 1804년 3월 피트의 애딩턴에 대한 의회 공격으로 그의 의회 다수가 줄어들어 하원에서 패배가 임박했다.

3. 2. 총리 퇴임 이후

애딩턴은 하원에서 자신을 충성스럽게 지지하는 많은 하원 의원들을 확보했기 때문에 중요한 정치적 인물로 남았다. 그는 1804년 12월, 호크스베리 경의 중재로 피트와 화해했다.[2] 그 결과, 피트는 그가 1805년 1월 내각에 추밀원 의장으로 합류하도록 주선했다. 피트는 애딩턴이 하원에서 함께 앉는 불편함을 피하기 위해 귀족 작위를 받아들일 것을 주장했다. 애딩턴은 1805년 1월 12일에 데번주 시드머스의 시드머스 자작으로 창설되었다.[2] 1805년 1월 12일, 연합 왕국 귀족인 데번주 시드머스에서 시드머스 자작으로 서임되었고, 15일 귀족원 의원이 되었다[6]

애딩턴의 충성스러운 지지자들이 정부를 지지하는 대가로, 피트는 애딩턴의 동료인 로버트 호바트 (4대 버킹엄셔 백작)를 랭커스터 공작 영지 재상으로 포함시키고, 더 높은 직위가 공석이 되면 그를 내각의 더 선임된 직위로 승진시키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1805년 7월 멜빌이 해군 경(First Lord of the Admiralty)에서 사임하자, 피트는 버킹엄셔 대신 찰스 미들턴 경을 임명함으로써 약속을 어겼다. 배신으로 인해 애딩턴과 버킹엄셔는 사임했고, 모든 지지자들을 야당으로 데려갔다.[2]

제2차 소 피트 내각에서는 1805년 1월부터 7월까지 추밀원 의장을 맡았다[6]。 소 피트 사망 후 성립된 그렌빌의 "거국 인재 내각/Ministry of All the Talents영어" (연합 내각)에는 1806년 2월부터 10월까지 국새 상서, 1806년 10월부터 1807년 3월까지 추밀원 의장으로 참여했다[6]。 애딩턴은 1806년 피트를 계승한 모든 재능 내각에서 추밀원 부대신으로 임명되었다. 그해 말 그는 1807년까지 추밀원 의장 직으로 복귀했다. 그의 사임은 모든 재능 내각의 붕괴를 촉진했다. 애딩턴은 조지 3세 국왕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내각이 고려하고 있던 제한적인 가톨릭 해방 조치에 반대했다.

1812년 4월 추밀원 의장으로 스펜서 퍼시벌 내각에 입각, 같은 해 리버풀 백작 내각이 성립되자 6월 내무부 장관으로 전임했다[6]。 이후 1822년까지라는 장기간 동안 이 직책에 재직했다[6]。 이 내각에서 그는 토리 반동 정치가의 대표격으로 알려졌으며, 여명기의 노동 운동에 대해 "피터루 학살"이나 집회 및 시위를 금지하는 "치안 6법" 제정 등 탄압 자세를 보였다. 1822년 1월 17일 내무부 장관에서 물러났지만, 무임소 장관으로 1824년 11월까지 내각에 머물렀다[6]。 후임에는 자유주의적인 로버트 필이 취임했다.

1814년 6월 16일, 옥스퍼드 대학교로부터 명예 학위를 수여받았다[6]

1844년 2월 15일 런던의 화이트 로지에서 사망, 23일 모트레이크/Mortlake영어에서 매장되었다[6]

3. 2. 1. 내무부 장관 재임 (1812년 ~ 1822년)

1812년 3월, 그는 다시 추밀원 의장으로 정계에 복귀했고, 같은 해 6월에는 내무부 장관이 되었다. 내무부 장관으로서 애딩턴은 혁명적 반대에 대처하여, 1817년 일시적인 인신 보호 영장 정지와 1819년 6개 법안 통과에 책임이 있었다. 그의 재임 기간 중에는 1819년 피터루 학살도 발생했다. 그는 1822년 사임했으며, 로버트 필 경이 그의 뒤를 이어 내무부 장관이 되었다.

3. 2. 2. 말년

애딩턴은 1844년 2월 15일 런던에서 인플루엔자로 86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며, 현재 그레이터 런던에 있는 모틀레이크 하이 스트리트의 성 메리 버진 교회 묘지에 묻혔다.[4]

4. 평가 및 유산

헨리 애딩턴은 연설이 빈약했다는 평가를 받는다.[7] "젊은이의 기쁨의 결여는 고통이다. 노인의 고통의 결여는 기쁨이다"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7]

4. 1. 사회적, 정치적 유산

5. 추가 정보

5. 1. 거주지

애딩턴은 데번주 어포터리와 현재 레딩, 버크셔 교외 지역인 우들리, 버크셔의 불머시 코트에 집을 소유했지만, 총리가 되면서 리치몬드 공원의 화이트 로지로 이사했다.[3] 하지만 우들리 예오마니 기병대의 사령관이자 레딩의 고위 관리로서 우들리와 레딩 지역과의 관계를 유지했다.[3] 또한 그는 오늘날 로열 버크셔 병원 부지인 4에이커의 토지를 레딩 타운에 기증했으며, 그의 이름은 데바이시스의 시드머스 스트리트, 레딩의 우들리에 있는 애딩턴 스페셜 스쿨과 함께 레딩의 시드머스 스트리트와 애딩턴 로드에 기념되어 있다.[3] 데바이시스에서 그는 1814년에 건설된 제임스 와이어트가 설계한 새로운 데바이시스 마켓 크로스에 비용을 지불했다.[3]

모틀레이크의 기념비


1795년부터 하원의장으로서 그는 국회의사당 북동쪽에 있는 웨스트민스터 궁전에 거주했다.

5. 2. 서훈 및 영예

헨리 애딩턴, 시드머스 자작 문장


시드머스 자작의 문장(紋章)은 다음과 같다.

  • 관(冠, Coronet): 영국 자작(Viscount)의 관
  • 투구 윗장식(Crest): 고양이과 동물(Cat-a-mountain)이 정자세로 앉아 정면을 바라보며, 적절한(Proper) 금전반점(bezanty)을 지니고 오른발을 방패에 올려놓고 있다. 방패는 파랑색(Azure)이며, 그 안에는 황금색(Or)의 왕관으로 덮인 꼿꼿한 곤봉(Mace)이 새겨져 있으며, 은색(Argent)의 각지게 새겨진 테두리(Bordure engrailed) 안에 위치한다.
  • 방패(Escutcheon): 좌우 대칭 에르민(Ermine)과 에르미네(Erminés)이며, 다섯 개의 마름모꼴(Lozenges)이 반전된 형태의 쉐브론(Chevron)이 세 개의 금색(Or) 백합(Fleurs-de-lis) 사이에 위치한다.
  • 방패지기(Supporters): 양쪽에 수사슴(Stag)이 위치하며, 오른쪽(dexter)의 수사슴은 에르미네(Erminés)이고 왼쪽(sinister)은 에르민(Ermine)이며, 뿔(attired)과 쇠사슬(Chain)을 목에 걸고 그 아래에 열쇠(Key)를 매달고 있으며, 모두 금색(Or)이다.
  • 표어(Motto): ''Libertas sub rege pio'' (라틴어, 경건한 왕 아래의 자유)

5. 3. 관련 도서

wikitext

  • Addington, Henry영어, 에드워드 펠루 참조
  • Sidmouth, Henry Addington, 1st Viscount영어
  • Addington, Henry (1757-1844)영어, 윌리엄 헌트 참조
  • Addington, Henry영어

6. 각주

참조

[1] 서적 British Prime Ministers https://archive.org/[...] Amberley Publishing 2013
[2] 간행물 London Gazette 1805-01-12
[3] 서적 Classical Buildings of Wiltshire & Bath: A Palladian Quest Millstream 2000
[4] 웹사이트 First Viscount Sidmouth http://www.napoleon-[...] 2016-04-09
[5] 웹사이트 ADDINGTON, Henry (1757-1844), of Woodley, nr. Reading, Berks. and White Lodge, Richmond Park, Surr. https://www.historyo[...] HistoryofParliament 2024-03-10
[6] 서적 The Complete Peerage, or a history of the House of Lords and all its members from the earliest times (Rickerton to Sisonby) https://www.familyse[...] The St Catherine Press
[7] 웹사이트 Past Prime Ministers Henry Addington 1st Viscount Sidmouth https://www.gov.uk/g[...] UK Government 2024-03-10
[8] 웹사이트 Devizes https://www.historyo[...] HistoryofParliament 2024-03-10
[9] 웹사이트 SUTTON, James (c.1733-1801), of New Park, Devizes, Wilts. https://www.historyo[...] HistoryofParliament 2024-03-10
[10] 웹사이트 Devizes https://www.historyo[...] HistoryofParliament 2024-03-10
[11] 문서 Addington, Henry (1) Alox2
[12] 서적 The Peerage of the British Empire as at Present Existing https://books.google[...] Hurst and Blackett 1869
[13] 서적 A Genealogical and Heraldic History of the Peerage and Baronetage, The Privy Council, and Knightage https://books.google[...] Burke's Peerage, L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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